아웃도어브랜드가 산에서 내려와 거리에서 살아남기까지의 진짜 이야기

매장에서 본 아웃도어브랜드의 이상한 변화
얼마 전 백화점 스포츠 층을 걷다가 꽤 익숙한 장면을 봤습니다. 예전에는 등산화, 고어텍스 재킷, 스틱이 전면에 있던 아웃도어브랜드 매장에 이제는 숏패딩, 플리스, 볼캡, 크로스백이 더 크게 걸려 있더군요. 산에 가는 사람보다 카페에 가는 사람이 먼저 떠오르는 진열이었습니다.
사실 이 변화는 갑작스러운 유행이 아닙니다. 아웃도어브랜드는 원래 기능을 팔던 시장이었습니다. 방수, 방풍, 보온, 내구성 같은 말이 곧 신뢰였죠. 그런데 어느 순간 소비자는 기능만으로 움직이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산에 자주 가지 않아도 ‘아웃도어 감성’은 갖고 싶어졌고, 브랜드는 그 욕망을 꽤 빠르게 읽었습니다.
브랜드 기획자로 일하면서 여러 카테고리를 봤지만, 아웃도어만큼 약속의 방향이 크게 바뀐 시장도 드뭅니다. 처음의 약속은 ‘당신을 자연에서 지켜주겠다’였습니다. 지금의 약속은 조금 다릅니다. ‘당신의 일상에도 탐험의 분위기를 입혀주겠다’에 가깝습니다.
등산복은 왜 갑자기 일상복이 됐을까
200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한국 아웃도어 시장은 폭발적으로 커졌습니다. 중장년층 등산 인구가 늘었고, 주말 산행 문화가 가족 단위 여가로 자리 잡았습니다. 당시 매장에 가면 50만 원대 재킷도 흔했고, 기능성 소재 이름이 광고의 주인공이었습니다.
그런데 시장이 커지면 꼭 생기는 문제가 있습니다. 모두가 비슷해집니다. 빨간 재킷, 노란 재킷, 검은 등산바지, 큰 로고. 브랜드는 다르지만 매대에서 주는 인상은 거의 같았죠. 소비자 입장에서는 굳이 특정 브랜드를 고를 이유가 약해졌습니다. 기능은 상향 평준화됐고, 가격은 높았고, 디자인은 겹쳤습니다.
이때 일부 브랜드가 방향을 틀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노스페이스는 학생들의 패딩 문화와 맞물리며 거리의 브랜드가 됐습니다. 원래 산에서 입는 옷이었지만, 10대와 20대가 입기 시작하면서 상징이 바뀌었습니다. 따뜻한 옷을 넘어 ‘또래 안에서 통하는 옷’이 된 겁니다.
디스커버리 익스페디션이나 내셔널지오그래픽 어패럴처럼 라이선스 기반 브랜드가 빠르게 성장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 브랜드들은 전문 등반가보다 도시 소비자에게 더 명확하게 말했습니다. 자연, 여행, 탐험의 이미지를 일상복으로 가져오겠다는 약속이었죠. 기능보다 무드가 먼저 보였고, 그게 오히려 대중에게 쉬웠습니다.
성공한 브랜드는 기능을 버린 게 아니라 번역했다
여기서 오해하면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잘된 아웃도어브랜드가 기능을 포기한 건 아닙니다. 다만 기능의 언어를 바꿨습니다. 과거에는 ‘방수 20,000mm’ 같은 스펙이 설득의 중심이었다면, 지금은 ‘비 오는 출근길에도 편하다’는 식의 생활 언어가 더 강하게 먹힙니다.
브랜드 약속도 마찬가지입니다. 파타고니아는 환경 철학을 오래 밀고 갔습니다. 2011년 블랙프라이데이에 ‘이 재킷을 사지 말라’는 메시지를 던졌던 캠페인은 지금도 자주 회자됩니다. 솔직히 광고 문구만 보면 판매와 반대 방향처럼 보이지만, 브랜드가 해온 약속과 맞았기 때문에 힘이 생겼습니다. 덜 사고 오래 쓰자는 태도가 제품, 수선, 캠페인에 반복적으로 쌓였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약속이 흐려지면 브랜드는 쉽게 흔들립니다. 아웃도어가 잘된다고 전부 플리스를 만들고, 숏패딩을 만들고, 여행 이미지를 붙인다고 소비자가 믿어주지는 않습니다. 소비자는 생각보다 냉정합니다. 이 브랜드가 왜 이 옷을 만들어야 하는지, 왜 이 가격을 받아야 하는지, 왜 내 옷장에 들어와야 하는지를 감으로 판단합니다.
- 기능 중심 브랜드는 일상에서 쓸 이유를 만들어야 합니다.
-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는 이미지 뒤에 제품 완성도를 증명해야 합니다.
- 환경과 철학을 말하는 브랜드는 운영 방식까지 같은 방향이어야 합니다.
몰락은 보통 유행이 끝나서가 아니라 이유가 사라져서 온다
아웃도어브랜드의 어려움은 대개 유행의 문제가 아닙니다. 더 정확히는 구매 이유의 문제입니다. 시장이 좋을 때는 카테고리 성장만으로도 매출이 납니다. 매장 수를 늘리고, 광고를 크게 하고, 인기 모델을 쓰면 어느 정도 성과가 따라옵니다. 근데 성장기가 지나면 질문이 바뀝니다. ‘왜 이 브랜드여야 하지?’가 남습니다.
2010년대 중반 이후 국내 아웃도어 시장이 조정을 겪은 것도 이 지점과 맞닿아 있습니다. 등산 인구만 보고 확장했던 브랜드는 젊은 소비자와 연결되기 어려웠고, 너무 강한 중장년 이미지가 오히려 장벽이 됐습니다. 반대로 젊어 보이려고만 한 브랜드는 기존 고객을 잃고 새 고객도 깊게 잡지 못했습니다.
브랜드가 무너질 때는 보통 로고가 낡아서가 아닙니다. 광고가 촌스러워서만도 아닙니다. 처음에 했던 약속과 지금 파는 제품, 매장, 가격, 모델, 캠페인이 서로 다른 말을 하기 시작할 때 균열이 생깁니다. 소비자는 그걸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느낍니다. ‘예전만 못하다’는 말은 대개 그 감각에서 나옵니다.
앞으로의 아웃도어브랜드는 어디에 서야 할까
요즘 아웃도어는 다시 기회를 맞고 있습니다. 캠핑, 트레킹, 러닝, 백패킹, 차박처럼 자연을 소비하는 방식이 훨씬 다양해졌습니다. 코로나19 이후 야외 활동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일상복과 기능복의 경계도 계속 흐려졌습니다. 이건 브랜드에게 꽤 좋은 환경입니다. 다만 쉬운 환경은 아닙니다.
앞으로 살아남는 아웃도어브랜드는 산과 도시 중 하나만 고르는 브랜드가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대신 자기만의 사용 장면을 선명하게 잡는 브랜드가 유리합니다. 파타고니아처럼 철학을 깊게 파거나, 아크테릭스처럼 고기능과 프리미엄 이미지를 밀도 있게 쌓거나, 노스페이스처럼 대중성과 헤리티지를 동시에 굴리는 식입니다.
브랜드 마케팅을 오래 하다 보면 결국 같은 장면으로 돌아옵니다. 소비자는 제품을 사지만, 오래 기억하는 건 브랜드가 반복해서 지킨 약속입니다. 아웃도어브랜드도 다르지 않습니다. 산에 있든, 거리로 내려오든, 캠핑장에 있든 중요한 건 하나입니다. 이 브랜드가 나의 어떤 순간을 더 낫게 만들어준다고 믿게 하느냐. 그 믿음이 남아 있는 브랜드는 유행이 지나도 다시 불릴 이름을 갖게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