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팅학과를 나온 후배들과 일해봤더니, 브랜드 현장에서 진짜 갈리는 것들

처음엔 전공보다 질문이 먼저 보였다
얼마 전 신입 면접을 보는데, 마케팅학과 출신 지원자가 꽤 많아졌다는 걸 다시 느꼈습니다. 예전에는 경영학과 안에서 마케팅 수업 몇 개 들은 사람이 많았다면, 요즘은 아예 마케팅을 전공으로 삼고 들어오는 친구들이 눈에 띄게 늘었습니다. 그런데 현장에서 12년쯤 브랜드를 다루다 보니, 전공 이름보다 더 먼저 보이는 게 있습니다. 이 사람이 소비자를 숫자로만 보는지, 아니면 숫자 뒤에 있는 생활을 상상하는지입니다.
마케팅학과라고 하면 보통 광고, SNS, 브랜딩, 시장조사 같은 단어를 떠올립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다만 실제 업무는 생각보다 덜 화려합니다. 엑셀을 열고 매출 추이를 보고, 리뷰를 읽고, 경쟁사 가격을 캡처하고, 왜 이번 캠페인 클릭률은 1.2%에서 멈췄는지 따지는 시간이 훨씬 깁니다. 브랜드는 멋진 문장으로만 자라지 않습니다. 약속을 정하고, 그 약속을 제품·가격·유통·커뮤니케이션에서 반복해서 지킬 때 겨우 기억됩니다.
마케팅학과에서 배우는 것과 회사에서 부딪히는 것
학교에서 배우는 마케팅은 꽤 체계적입니다. STP, 4P, 소비자행동론, 브랜드관리, 디지털마케팅, 마케팅조사 같은 과목은 현장에서도 계속 등장합니다. 저도 회의실에서 포지셔닝 맵을 몇 번이나 다시 그렸는지 모릅니다. 근데 문제는 도구를 아는 것과 쓸 줄 아는 것이 다르다는 데 있습니다.
예를 들어 4P를 배웠다고 해도, 실제 브랜드 회의에서는 제품팀이 원가 때문에 기능을 줄이자고 하고, 영업팀은 대형 채널 입점을 위해 가격을 낮추자고 하고, 광고팀은 프리미엄 이미지를 유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때 마케터는 교과서처럼 Promotion만 담당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브랜드가 소비자에게 한 약속이 어디서 깨지는지 찾아내는 사람에 가깝습니다.
- 시장조사는 설문지를 만드는 기술보다 좋은 가설을 세우는 능력이 중요합니다.
- 브랜딩은 예쁜 로고보다 소비자가 반복해서 기대할 수 있는 경험을 만드는 일입니다.
- 디지털마케팅은 광고비를 태우는 일이 아니라 CAC, 전환율, 재구매율을 같이 보는 일입니다.
- 소비자행동론은 이론 암기가 아니라 사람들이 왜 말과 다르게 사는지 관찰하는 훈련입니다.
사실 마케팅학과 출신 신입이 강점을 보이는 순간도 분명합니다. 고객 세분화나 브랜드 포지셔닝 같은 개념을 설명하면 빠르게 받아들입니다. 반대로 약한 지점도 자주 보입니다. 캠페인의 성공을 조회수로만 판단하거나, 타깃을 2030 여성처럼 너무 넓게 잡는 경우입니다. 현장에서는 29세 직장인 여성도 월세를 내는 사람, 신혼집을 꾸미는 사람, 운동화에 20만 원을 쓰는 사람, 생필품은 최저가만 사는 사람으로 갈립니다.
성공한 브랜드는 전공 지식보다 약속을 잘 지켰다
제가 오래 지켜본 브랜드 중 오래 가는 곳은 대체로 말이 적고 행동이 일정했습니다. 나이키가 운동선수만 팔지 않고 도전의 감정을 판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애플은 기능표를 길게 늘어놓기보다 사용 경험의 통제감을 팔았습니다. 무신사는 단순한 쇼핑몰에서 출발했지만, 스트리트 패션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취향의 장으로 포지션을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 브랜드들이 운이 없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운도 있었습니다. 시장 타이밍, 경쟁사의 실수, 기술 변화, 소비자 문화의 이동이 모두 맞물렸습니다. 다만 운이 왔을 때 그것을 받을 수 있는 약속의 형태를 미리 만들어두었다는 점이 다릅니다. 브랜드가 계속 흔들리면 좋은 기회가 와도 소비자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마케팅학과에서 배운 프레임워크는 이때 쓸모가 있습니다. 단, 답안지를 쓰기 위한 틀이 아니라 의사결정을 흔들리지 않게 만드는 기준으로 써야 합니다. 우리 브랜드는 누구에게 선택받고 싶은가. 그 사람은 우리를 어떤 상황에서 떠올리는가. 우리가 포기해야 할 고객은 누구인가. 이 질문을 계속 붙잡는 브랜드는 캠페인이 한 번 실패해도 완전히 무너지지 않습니다.
실패한 브랜드는 보통 광고 전에 약속이 깨졌다
브랜드가 무너지는 장면도 많이 봤습니다. 겉으로는 광고가 약했다, 모델 선정이 아쉬웠다, 바이럴이 안 됐다 같은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안쪽을 들여다보면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제품은 대중형인데 가격은 프리미엄이고, 메시지는 친환경인데 포장은 과하고, 고객센터 응대는 느린데 광고는 따뜻한 브랜드라고 말하는 식입니다.
소비자는 생각보다 똑똑합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예민합니다. 브랜드가 한 말과 실제 경험이 다르면 금방 알아차립니다. 특히 리뷰, 커뮤니티, 숏폼 콘텐츠가 연결된 지금은 그 간극이 빠르게 퍼집니다. 예전에는 광고비로 어느 정도 덮을 수 있었던 불일치가 이제는 캡처 한 장으로 돌아옵니다.
마케팅학과 학생들이 이 지점을 알면 좋겠습니다. 마케팅은 소비자를 설득하는 기술이기도 하지만, 회사 안에서 브랜드의 약속을 지키게 만드는 내부 정치이기도 합니다. 좋은 마케터는 멋진 카피를 쓰는 사람만이 아닙니다. 제품팀에 이 기능은 빼면 안 된다고 말하고, 영업팀에 이 할인은 브랜드를 싸게 보이게 만든다고 설명하고, 대표에게 지금 성과를 위해 장기 신뢰를 태우고 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케팅학과를 고민한다면 봐야 할 현실
솔직히 말하면 마케팅학과를 나왔다고 바로 브랜드 전략가가 되는 건 아닙니다. 첫 업무는 소재 업로드, 리포트 작성, 경쟁사 모니터링, 인플루언서 리스트업일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이 잡무처럼 보이는 일에서 감각이 생깁니다. 어떤 썸네일이 클릭을 만들고, 어떤 리뷰 문장이 구매 망설임을 보여주고, 어떤 가격대에서 소비자가 갑자기 차갑게 돌아서는지 몸으로 알게 됩니다.
전공을 살리고 싶다면 포트폴리오도 조금 다르게 만들어야 합니다. 가상의 브랜드 로고와 슬로건만 보여주는 자료는 금방 잊힙니다. 차라리 작은 브랜드 하나를 골라 시장, 고객, 경쟁, 메시지, 채널, 매출 가설까지 연결해서 보는 편이 낫습니다. 예를 들어 동네 샐러드 가게라면 점심 직장인 시장, 배달앱 리뷰, 재주문 쿠폰, 근처 경쟁 매장의 가격표, 인스타그램 콘텐츠 반응을 함께 보면 이야기가 생깁니다.
마케팅학과의 가치는 전공명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소비자의 마음을 낭만적으로만 보지 않고, 숫자를 차갑게만 보지도 않는 균형에 있습니다. 브랜드는 결국 사람에게 약속하고, 회사 안에서 그 약속을 지키는 시스템을 만드는 일입니다. 그걸 재미있다고 느끼는 사람이라면, 마케팅학과는 꽤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화려한 캠페인보다 지루한 관찰을 오래 버틸 수 있어야 합니다. 현장에서 오래 살아남는 마케터들은 대체로 그 지루함 속에서 남들이 못 본 단서를 먼저 주워 올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