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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도어브랜드가 산을 내려와 도시를 점령한 진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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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도어브랜드가 산을 내려와 도시를 점령한 진짜 이야기

등산복이 지하철을 탄 순간

얼마 전 출근길 지하철에서 재미있는 장면을 봤습니다. 양복 위에 얇은 쉘 재킷을 걸친 40대 직장인, 레깅스에 고어텍스 신발을 신은 20대, 그리고 백팩에 카라비너를 단 대학생이 같은 칸에 서 있더군요. 셋 다 산에 가는 복장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모두 아웃도어브랜드를 입고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아웃도어브랜드가 꽤 명확했습니다. 산에 가는 사람이 입는 옷. 비싸지만 튼튼한 옷. 부모님 세대의 주말 유니폼. 2010년대 초반 한국 시장에서 등산 재킷은 기능성의 상징이었고, 일부 브랜드는 연매출 5천억 원을 넘기며 백화점과 대리점의 좋은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당시의 약속은 단순했습니다. “당신을 자연에서 안전하게 지켜주겠다.”

근데 브랜드는 약속이 너무 잘 먹힐 때도 위험해집니다. 모두가 같은 약속을 외치면, 결국 소비자는 색깔과 할인율만 보게 되거든요.

기능성만 팔던 브랜드가 갑자기 낡아 보인 이유

아웃도어브랜드의 전성기에는 방수, 방풍, 투습 같은 단어가 거의 주문처럼 쓰였습니다. 매장 직원은 원단명을 설명했고, 광고는 히말라야와 암벽을 보여줬습니다. 그때는 통했습니다. 중장년층에게 아웃도어 의류는 체력과 여유, 자기관리의 증거였으니까요.

문제는 시장이 너무 빨리 커졌다는 겁니다. 기능성 재킷은 매년 새로 살 필요가 없는 제품입니다. 게다가 디자인은 비슷했고, 가격은 높았습니다. 소비자는 어느 순간 “이게 정말 필요한가?”를 묻기 시작했습니다. 브랜드가 약속한 야생의 순간은 멋졌지만, 실제 소비자의 하루는 아파트 엘리베이터와 사무실, 카페, 주차장에 더 가까웠습니다.

여기서 갈림길이 생겼습니다. 어떤 브랜드는 계속 산만 바라봤고, 어떤 브랜드는 도시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노스페이스가 눕시 재킷을 스트리트 패션의 아이콘으로 되살린 것, 파타고니아가 환경 메시지를 제품보다 앞에 세운 것, 아크테릭스가 고기능 장비를 미니멀한 도시 스타일로 번역한 것이 대표적입니다. 이들은 기능을 버린 게 아닙니다. 기능의 사용 장면을 바꿨습니다.

잘나가는 아웃도어브랜드는 ‘산’이 아니라 ‘상태’를 팝니다

브랜드 기획을 하다 보면 제품 카테고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소비자가 그 제품을 쓰는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느끼는가입니다. 아웃도어브랜드는 원래 산에 오르는 사람을 위한 브랜드였지만, 지금은 꽤 다른 감정을 팝니다.

  • 바쁘지만 몸을 놓지 않는 사람이라는 감각
  • 비싼 로고보다 오래 쓰는 물건을 고른다는 태도
  • 도시에서도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여유
  • 환경과 소비의 관계를 신경 쓴다는 신호

특히 젊은 소비자에게 아웃도어는 더 이상 등산의 결과물이 아닙니다. 라이프스타일의 표식입니다. 주말에 북한산을 가지 않아도 트레일 러닝화를 신을 수 있고, 캠핑을 자주 안 가도 플리스 재킷을 입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실제 사용보다 ‘쓸 수 있을 것 같은 나’가 더 자주 팔립니다.

여기서 브랜드의 실력이 드러납니다. 억지로 젊어 보이려는 브랜드는 로고를 키우고 색을 튀게 합니다. 반대로 감각 있는 브랜드는 착용 장면을 바꿉니다. 등산로 대신 편집숍, 산 정상 대신 비 오는 퇴근길, 전문 장비 대신 매일 입는 레이어링으로 제품을 재배치합니다. 같은 재킷도 어디에 놓이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약속이 됩니다.

몰락은 제품력이 아니라 약속의 노화에서 온다

브랜드가 무너질 때 현장에서는 보통 이런 말이 먼저 나옵니다. “요즘 제품이 별로야.” 그런데 깊이 들어가 보면 제품력이 갑자기 사라진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더 자주 보이는 건 약속이 늙는 상황입니다.

예를 들어 “전문 산악인을 위한 최고 기능”이라는 약속은 멋집니다. 하지만 그 약속만 붙잡고 있으면 소비자층이 좁아집니다. 반대로 “누구나 입는 국민 아웃도어”가 되면 매출은 커질 수 있지만 희소성이 약해집니다. 브랜드는 대중화로 돈을 벌고, 대중화 때문에 매력을 잃습니다. 이게 참 잔인합니다.

한국 아웃도어 시장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한때 부모님 세대의 필수품처럼 팔리던 브랜드들이 젊은 소비자에게는 “아빠 옷”으로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광고 모델을 바꾸고, 컬래버레이션을 하고, 로고를 정리해도 쉽게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이미 소비자 머릿속의 자리가 굳어졌기 때문입니다. 브랜드 이미지는 매출표보다 늦게 움직이지만, 한번 굳으면 매출표보다 더 무섭게 발목을 잡습니다.

파타고니아와 아크테릭스가 보여준 다른 길

흥미로운 건 성공한 브랜드들이 모두 같은 방식으로 성공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파타고니아는 환경과 수선, 오래 입기를 브랜드의 중심에 뒀습니다. “새것을 사라”보다 “필요한 만큼만 사라”에 가까운 태도를 취했죠. 상식적으로는 매출에 불리해 보이지만, 오히려 강력한 신뢰 자산이 됐습니다. 소비자는 그 브랜드가 하는 말과 행동이 어느 정도 맞아떨어진다고 느꼈습니다.

아크테릭스는 다른 길을 갔습니다. 고가, 고기능, 절제된 디자인. 매장에 들어가면 할인보다 완성도가 먼저 보입니다. 이 브랜드가 파는 것은 단순한 재킷이 아니라 “나는 과장하지 않아도 좋은 것을 안다”는 감각에 가깝습니다. 기능성의 언어를 패션의 언어로 번역한 셈입니다.

노스페이스는 또 다릅니다. 과거의 헤리티지를 버리지 않고 스트리트와 연결했습니다. 눕시 같은 제품은 원래 추위에 강한 제품이었지만, 어느 순간 거리의 실루엣이 됐습니다. 기능은 그대로인데 문화적 의미가 바뀐 겁니다. 이게 쉬워 보이지만, 사실 브랜드 자산이 없으면 흉내 내기 어렵습니다.

아웃도어브랜드가 다시 살아나려면

앞으로의 아웃도어브랜드는 더 이상 “우리 옷은 튼튼합니다”만으로 설득하기 어렵습니다. 요즘 소비자는 튼튼한 제품을 원하지만, 동시에 그 제품이 내 일상에 자연스럽게 들어오길 바랍니다. 산에서도 괜찮고, 카페에서도 어색하지 않고, 3년 뒤에도 촌스럽지 않은 물건. 말은 쉽지만 실제로는 디자인, 유통, 가격, 메시지가 모두 맞아야 합니다.

제가 보는 좋은 방향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기능을 과시하지 말고 생활 속 장면으로 보여주는 것. 둘째, 지속가능성을 캠페인이 아니라 운영 방식으로 만드는 것. 셋째, 세대별로 다른 약속을 억지로 하나로 묶지 않는 것. 50대 고객에게 신뢰였던 요소가 20대에게는 부담일 수 있고, 20대가 좋아하는 미니멀함이 기존 고객에게는 밋밋함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브랜드는 결국 기억의 사업입니다. 소비자가 특정 로고를 봤을 때 떠올리는 장면, 사람, 온도, 태도가 쌓여 가격을 만듭니다. 아웃도어브랜드의 다음 싸움은 더 높은 산이 아니라 더 넓은 일상에서 벌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산을 잘 아는 브랜드가 도시까지 설득할 수 있다면, 그건 단순한 확장이 아니라 오래된 약속을 새롭게 번역하는 일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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