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ㅁㅎㅈㅎ가 곰표 맥주를 키운 뒤 남긴 것

편의점 맥주 진열대에서 곰표 밀맥주를 처음 봤을 때, 저도 잠깐 멈췄습니다. 밀가루 포대에서 보던 하얀 곰이 맥주 캔에 앉아 있었거든요. 어울리지 않는 듯한데 이상하게 납득이 됐습니다. 밀가루와 밀맥주. 이 기묘한 조합, 그러니까 ㄱㅁㅎㅈㅎ에는 웃고 지나칠 만한 장난 이상의 설계가 있었습니다.
곰표가 맥주를 만날 명분은 있었다
대한제분의 곰표는 오래된 밀가루 브랜드입니다. 소비자에게 익숙한 이름이지만, 밀가루는 대개 장바구니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반면 편의점 맥주는 눈에 띄는 캔 하나가 선택을 바꿀 수 있는 상품이죠. 2020년 대한제분, 세븐브로이, CU가 곰표 밀맥주를 선보인 자리는 그래서 꽤 영리했습니다. 곰표의 인지도를 사람들이 직접 집어 드는 상품으로 옮길 수 있었으니까요.
이 조합이 무작정 엉뚱했던 것도 아닙니다. 밀가루 브랜드가 밀맥주에 등장하니 소비자는 둘 사이에 ‘밀’이라는 연결고리를 금방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름과 맛의 기대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던 셈입니다. 앞서 곰표 디자인을 활용한 팝콘이 화제를 모은 경험도 있었습니다. 밀맥주는 그 반응을 더 큰 시장에서 시험한 선택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타이밍도 좋았습니다. 당시 편의점에서는 개성 있는 수제맥주를 찾는 손길이 늘고 있었고, 눈에 띄는 패키지는 진열대에서 강했습니다. 브랜드 기획을 오래 하다 보면 이런 순간을 자주 봅니다. 아이디어가 좋아도 소비자가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됐다면 조용히 사라집니다. 곰표 밀맥주는 제품과 판매 장소, 시장의 관심이 드물게 맞물린 경우였습니다.
첫 구매는 곰이 만들고 다음 구매는 맥주가 만들었다
하얀 곰은 캔을 한 번 들어 보게 하는 데 강력했습니다. 하지만 귀여운 그림만으로 몇 년간 팔릴 수는 없습니다. 곰표 밀맥주가 약속한 것은 의외성에 더해 실제로 마실 만한 밀맥주였습니다. 익숙한 브랜드를 보고 집었다가 맛이 기대에 못 미쳤다면, 화제는 한 번의 사진으로 끝났을 겁니다.
출시 직후 반응은 빨랐습니다. 당시 CU 발표를 전한 보도에 따르면 초도 물량 10만 캔이 사흘 만에 팔렸습니다. 이후 2023년 계약 종료 무렵까지 누적 판매량은 약 5800만 캔으로 알려졌습니다. 사흘의 품절은 호기심을 보여주고, 수천만 캔의 판매는 그 호기심이 반복 구매로 이어졌음을 보여줍니다. 두 숫자를 같은 성공으로 묶어 보면 놓치는 게 생깁니다.
제 눈에는 세 주체의 역할도 중요합니다. 대한제분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이름을, 세븐브로이는 마실 제품을, CU는 발견하고 구매할 장소를 맡았습니다. 어느 한 회사의 로고가 혼자 이 성과를 만든 것은 아닙니다. 소비자가 만난 것은 캔 하나였지만, 그 뒤에서는 서로 다른 전문성이 한 약속을 떠받치고 있었습니다.
이름과 맛이 갈라지자 약속도 둘로 나뉘었다
성공한 협업일수록 끝나는 장면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2023년 곰표 상표 사용 계약이 끝나면서 그 장면이 현실이 됐습니다. 대한제분은 제조사를 바꿔 곰표 밀맥주를 이어갔고, 기존 제조사 세븐브로이는 이름과 캐릭터를 바꾼 대표 밀맥주를 내놓았습니다. 소비자 앞에는 곰표라는 이름을 가진 맥주와 익숙한 맛을 내세운 맥주가 따로 놓였습니다.
이때 드러난 질문은 단순히 상표가 누구 것이냐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사랑한 대상이 하얀 곰이었는지, 마시던 맛이었는지, 아니면 둘이 함께 주던 경험이었는지에 관한 질문입니다. 브랜드를 운영하는 쪽에서는 권리와 계약을 나눠 관리할 수 있습니다. 소비자는 그렇게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 곰표 맥주’라는 한 덩어리의 경험으로 기억하죠.
양측은 계약 종료 이후 판매와 제조를 둘러싸고 갈등을 겪었습니다. 다만 어느 한쪽의 주장만으로 분쟁의 책임을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2026년 4월 중소벤처기업부는 조정을 통해 양측이 소송과 신고를 취하하고 상생협력기금 출연에 합의했다고 밝혔습니다. 갈등이 뒤늦게 해소된 사실까지 이 협업의 이야기 안에 넣어야 합니다.
협업 기획서에 먼저 써야 할 한 문장
곰표 밀맥주 사례를 보고 ‘다음엔 어떤 뜻밖의 브랜드를 붙일까’부터 생각한다면 순서가 조금 아쉽습니다. 먼저 써야 할 문장은 소비자에게 무엇을 약속할 것인지입니다. 여기서는 낯익은 곰을 보고 웃게 하는 경험과, 다시 사고 싶은 맥주를 내놓는 일이 함께 약속이 됐습니다. 한쪽만 지켜서는 같은 상품이라고 느끼기 어려운 구조였습니다.
그다음에는 협업이 바뀌는 날을 기획해야 합니다. 상표 사용 기간, 제조사가 달라졌을 때의 설명, 남은 제품의 판매, 소비자에게 전달할 메시지까지요. 이런 항목은 출시 행사만큼 화려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브랜드를 믿고 샀던 사람에게는 훨씬 직접적입니다. 협업의 종료 방식 역시 브랜드 경험의 일부니까요.
ㄱㅁㅎㅈㅎ가 오래 기억에 남으려면 처음의 낯섦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곰표 밀맥주는 기묘한 조합이 얼마나 큰 관심을 만들 수 있는지 보여줬고, 그 관심이 커진 뒤에는 누가 어떤 약속을 이어갈지까지 생각해야 한다는 사실도 남겼습니다. 저는 여전히 그 하얀 곰을 보면 맥주 캔이 먼저 떠오릅니다. 그만큼 잘 맞았던 조합이라, 끝을 준비하는 일도 시작만큼 중요했다고 생각합니다.
